기형도 참회록
시화전 '안개는 들의 아래로'의 시작.
00과 만나 이별의 암시를 하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가 대했던 많은 대화들에 대하여 그녀의 슬픔이라는 몇 줄의 눈물로 보상받는 꼴이 되고 말았다. 오, 또 이렇게 되고 말았다. 언제나 나는 진실로 연애다운 사랑을 할 것인가. 통나무집에서 그녀가 키스를 요구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병신같은 계집애.
먼 훗날 당신의 첫 남자가 깨끗한 추억으로 서 있기를... '당신의 성숙기에 한 개의 방향지표처럼 서 있는 나'를 기억해달라고 했다. 어차피 헤어질 우리라면 네가 가까이 올수록 나는 접근할 수 없다고. 나에게서 네가 어떠한 확신(키스거나 밀어)를 얻으려는 너의 태도는 네가 아주 자신감이 없거나 성급히 우리 관계의 어떠한 결말을 재촉하는 것이 된다고 했다. 혐오감과 동정.
지난 81년 겨울 '하얀집' (라면집)의 김00씨가 생각났다. 나에게 파카를 벗어 준 머리가 길고 담배를 즐겨 피우던 키 큰 여자. 추호의 더러움도 느낄 수 없는 여자. 추워서 남쪽으로 내려왔다던 여자. 봄이 되면 다시 서울로 올라 가겠다던 여자. 그리고 그 해 겨울이 막 시작할 때 (12월 20일경) 말없이 라면집을 그만둔 여자. 그래서 내가 그후로 못 만난 여자.
"옷 주셔야죠?"
"아, 그렇군요. 너무 따스해서 나는 내 살인 줄 알았어요."
그 여자. 내가 지금 추억만으로서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상현달 같은 여자.
기형도, 참회록, 1982. 8.29
진영의 홈피를 오랜만에 들어가서 이 글을 봤네. 참 좋네 하다가
이 글을 좀 찾아봤더니 여러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 코멘트를 달았는데, 그것들을 읽다가 웃음이 푹
'기형도 글은 잘 쓰는데 이런 개새끼랑은 연애 죽어도 안해'
'글 잘쓰는 새끼들 존나 변태야'
'통나무녀 뭐가 되냐. 완전불쌍해'
'예민한척 약한척 현실 회피, 주위사람 힘들게 하지 마라'
나도 이런 남자친구가 있어 봐서 그런지
완전 동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