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우, 이 얘기 모르지?
라면가락 사이로 젓가락을 집어넣으며 엄마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시작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분명 내 어린 시절 이야기겠군.
-우린 좀 가난했고, 아빠 얼굴 보기도 힘들었어. 또 그때 나는 정말 무능했고, 하루 종일 너하고 둘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지.
네가 유치원 들어가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이웃들을 만나기 시작했는데, 그게 더 힘들더라. 내 자신이 초라하고 모든 게 불안하고,
아무튼. 그때가 내 인생 최악의 시절이었을 거야. 정말 무기력했으니까. 근데 한번은 네 야외학습 참관을 갔어.
전에 재욱 형한테 들려주었던 얘기이다. 노란 유치원복을 입은 내가 한 손에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을 들고 원생들의 줄 꽁무니를
따라가며 울었다나 어쨌다나.
-나 그때 처음 알았는데, 내가 널 좀 좋아하더라고. 그 전까지는 실패한 결혼의 일부로만 생각하는 줄 알았거든.
실패했지만 내 거니까 그냥...
-그렇다고 버려? 대충 그런 기분.
내가 삐딱하게 말하자 엄마가 젓가락 쥔 손을 두어 번 내젓는다.
-그건 아니지. 암튼 그제야 깨닫게 된 거야. 그때 네가 너무나 약해 보였지만 또 너무나 소중했어. 그런 존재가 나를 의지하고 태어나
성장하고 있다는 데에 이상한 감동 같은 게 오더라. 저애가 없으면 안 되겠구나. 아니 저애만 있으면 되겠구나. 그랬나? 아무튼.
심지어 내 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저애를 좋아할 것 같다, 그런 기분이었어.
자기 아들을 좋아하는 게 뭐 저렇게 생색내면서 자랑할 일이라고.
-좋아하는 게 있으면 사람은 달라질 수 있더라구. 강해지기도 하고. 그래서 그때 마음먹은 거야. 포기할 건 포기하고,
인생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로 단출하게 꾸려서 새로 살아봐야겠다고 말야.
-이혼?
-응. 나, 너 행복하게 못 해주니까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이게 아빠 입버릇이었거든.
-아빠 잘났어?
-뭐 조금쯤. 어쨌든 남들이 뭐라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만 해도 못난 건 아니지.
엄마도 나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 이윽고 엄마가 침묵을 깬다.
- 너 이런 말 이해할 수 있어? 너를 사랑하면서 세계를 경멸하기란 불가능하다.
- 너가 누군데. 지시어를 먼저 파악해야 하거든.
- 너는 너지. 여기 누구 또 있어. 암튼, 너하고 살아봐야겠다 마음 먹으면서 나는 세상을 다시 믿어보기로 했어.
사실 다른 선택도 없었고. 일자리부터 구해야 하는데, 방탄복을 입고 나갈 순 없잖아.
- 뭘 입고 나갔어?
- 비굴한 친절.
- 말도 안 돼.
내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건 원래 엄마 성격이잖아. 그냥 성격 나온 거네, 뭐. 사실이다. 엄마는 친절을 성의껏 실천하면서 산다.
그게 친절한 건지 서툴고 엉뚱한 건지 아리송할 때가 많은 게 문제지만.
눈을 들어 엄마를 똑바로 본다.
- 물어볼 게 한 가지 또 있는데.
- 뭔데?
- 재욱 형하고는 결혼 못 하는 거야?
- 말했잖아. 많은 걸 바라지 않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관계라고. 뭘 바라게 되면 무겁고 복잡해져.
- 그게 뭐야. 평행선?
- 시스템 안에 들어가기를 포기한 사람은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해야 해. 당연히 그건 마이너의 길이 될 수밖에 없고.
- 엄마는 왜 포기한 거야?
엄마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 그건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복합적이고.... 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모범생, 건전한 주부 이런 틀이 싫어서일 수도 있고, 그리고 결혼 문제라면, 사람의 감정이 지속된다는 걸 안믿게 된 거,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게 내 선택이야.
- 재욱 형도 남들과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한 거야?
- 응. 그러니까 나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지.
- 남들과 뭐가 다른데?
- 일단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잖아. 자유롭고.
- 결혼 같은 거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야?
- 글쎄.
엄마 표정이 복잡해진다.
-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 다른 상대라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어.
두번째 말 속에는 약간 뼈가 있다. 뭐지? 나한테 털어놓지 못할 성인 버전이 따로 있는 건가?
- 그럼 아주 헤어지는 거야?
- 아마도
- 재욱 형이 붙잡으면?
- 그럼 또 붙잡혀 있겠지 뭐.
거참 , 이런 건 또 의외로 간단하군. 엄마가 말을 잇는다.
- 근데 안 그럴거야.
- 아까 그 전화, 붙잡은 거 아니었어?
- 아니, 자기 잘못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고. 그래야 마음이 편해지니까.
숨을 들이마시며 도 한번 두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대는 엄마.
- 연우, 오늘 공부 너무 많이 하는데?
- 그러게, 힘드네.
- 오늘 수업 태도 괜찮았어. 웬일로 질문을 다 하고. 질문할 게 있다는 거, 그거, 좀 안다는 뜻이야. 근데.....
- 뭐?
- 왜 '성' 같은 걸 읽고 그래, 요즘?
- 응, 궁금해서.
- 그래서, 궁금증이 좀 풀렸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너무나 모호해서 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니 세계에 대해서는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거지, 어떻게 궁금증 같은 게 풀려?
신민아씨, 대체 카프카를 어떻게 읽은 거야.
-소년을 위로해줘. 178p
연우와 그의 엄마 신민아씨의 대화.
영화에서든 소설에서든 현실에서든
어른스러운 아이와 철이 덜 든 어른의 조합이 나는 좋더라.
전에도 든 생각이지만 이 책을 읽으며 왠지 더욱 현실화 되는 것 같다.
이제는 남편보다는 오히려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
남편이 생기는 것 보다 아이가 생기는게 더 현실적인 일 같다. 훗.